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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용 VS 장하준 :: 2009/04/04 22:10

어젯 밤 장하준 교수와 이창용 금융위 부위원장 TV 토론을 봤다.
장하준 교수는 글로만 보다 직접 말하는 것을 들으니 상상했던 것 보다 훨씬 젊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기대했던 장하준 교수 보단 처음 보는 이창용 부위원장에 더 마음이 갔다.
그간의 정부 당국자들이 보여주던 위선적인 모습 없이,
현실적인 도덕률이랄까, 아니면 문자 그대로 순수한 의미에서의 정치가로서의 모습 같은게 느껴졌다.
논리적이면서도 상대를 배려하는 말투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고.
장하준 교수가 빨리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 같은 느낌이었다면 이창용 부위원장은 따뜻한 봄바람 같았을테다.
비유를 하나 더 들자면 enlightened few versus enlightening leader.
나는 어느 쪽일까. 점점 더 어떤 쪽이 되어야 할까.

토론 내용을 얘기하자면,
제목은 '한국경제, 살길은' 이었는데 결론은,
글로벌 경제 위기가 예상보다 빠른 회복을 보이고 있고 (내 생각과는 다르다), 특히나 위기 초반에 나타난 한국 경제에 대한 불안 요인들이 해소되면서 앞으로 다른 나라들보다 더 빨리 회복세를 탈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정부의 위기 극복 대책들이 효과를 발휘하기 위하여 각 경제 주체들도 최선을 다해주어야 한다.
는 식으로 마무리된 것 같다.

전체적인 글로벌 경제위기의 관점에서 내 생각을 얘기하자면
우선은 회복이라기보단 시장의 실현 손실률이 경제 주체들의 컨센서스 손실률과 괴리를 좁혀오면서 불확실성이 해소되는 양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게 첫번째 생각이고,
그것들을 떠나서 지난 몇 년 간의 거품들이 걷혀진다고 그것이 내실있는 무엇으로 채워지지는 않을 것이기에 회복이라기 보단 휴유장애 정도가 나을 것 같다는 게 두번째 생각이다.
한국 정부를 바라보는 외국의 시각에 대해서는 현업에 있지 않으니 정확히 알 수는 없겠지만 보고 들은바로 짐작하건대 작년 연말보다 상황이 호전되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상황이라는 게 결국 기축 통화를 빌려올 수 있느냐 하는 것인데, CDS나 기업들의 채권 발행을 보면 알 수 있다.
다만 이것 역시 정부가 IR을 잘해서라기 보단 위에서 언급했듯 빌려줄 애들이 불확실성이 해소되니까 회수를 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쉬울 것이다.

금번의 위기에 대응하는 정부 정책에 대해서는 두분 모두 공감하셨듯 현재로서 답은 하나 밖에 없다.
재정지출 확대와 금리인하, 일자리 창출과 유동성 확대.
일각에서는 금리 문제로 경기침체가 심화되고, 최악의 경우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는 것 같던데 (작년 말에 나온 '공황전야' 라는 책에서 이것에 대한 얘기가 많고, 지난달엔가 '똑똑한 돈' 이란 책도 나왔는데 거기서는 인플레이션 그 자체에 대한 현실적인 재정의를 하고 있다.)
어느 정도 공감가는 면이 없진 않으나, 이를 반박하는 정부의 논리도 그리 허술해 보이진 않는다.
오히려 보다 중요한 것은 정부 정책의 결과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려질 것인가 하는 것이다.
즉, (단기적 + 저소득계층의)일자리 창출과 유동성 확대(자본소득 격차 확대)를 비판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쁜 와중에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도 짜증나는 일이겠지만
그들의 선의를 믿지 못하겠기에, 오히려 너무나도 당당한 계급의식에 치를 떨고 있는 요즘이라 이 위기가 지난 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위기가 끝나고, 국민 경제가 회복된 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져있을까 걱정이 된다.

그외 몇가지 재미난 얘기들이 나왔던 것들도 정리해본다.

금산분리 완화.
단순히 재벌의 사금융화에 대한 우려가 아니라 제조업과 금융업의 산업 구조의 측면에서 얘기가 되었다.
금융의 본래적 순기능에 대해서는 모두가 공감하는 바이지만,
금융업 육성은 결국 제조업 자본이 금융으로 이전되는 결과일 뿐이고 그러한 노력을 처음부터 제조업에 쏟았어야 함이 옳다라는 주장과
금융업 쪽으로 우리가 부족하기 때문에 더욱 준비해야 하고 그것은 금융의 본래적 순기능을 위해서이기도 하다라는 주장으로 나뉘었다.
나는 장하준 교수에 가까운 입장인데, 제조업 없이 경제 성장도 사회 안전도 없다는 생각이다.

자유무역.
두 국가 사이에서 자유무역은 진짜 자유무역이 아니다.
그것은 불공정 무역이다. 왜냐하면 그 두 국가와 무역을 하는 다른 여러 나라들에 대해서 불공평하기 때문이다.
장하준 교수가 한말이다. 당연한 얘기.
나는 가끔 이런 생각도 한다.
경영 경제 이론들은 선진국의 방패막이(혹은 '사다리 걷어차기') 역할을 위해 발전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자유무역 말은 좋다. 비전 혁신 효율 다운사이징 녹색성장.
전부다 말은 좋다. 순 거짓말. 그것으로 공격하고 교육하고 믿게 만들면 시간은 흐르지만 위치는 그대로다.

파생상품.
얼마 전에 장하준 교수가 모 언론사와 인터뷰를 했었는데 거기서 파생상품을 없애야 한다고 얘기했다.
지면과 같은 비유를 어제도 들었는데, 의약품의 경우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한다면 그 약은 시판되지 말아야 하듯이 파생상품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먹고나서 살 수도 있다. 죽어가는 사람은 먹는다.
죽는 것보다 무서운 게 탐욕이다.
돈 벌 수 있다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나온 게 파생상품이다.
비극은, 아파서 죽어가는 사람은 몇 안 되지만 돈 벌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전세계 그 어떤 나라의 금융당국도.
농담 삼아 친구랑 이런 얘기도 했다. 경제학에서 파생되어 나온 놈이 재무고 그게 태생을 못 버리고 바람 펴서 낳은 놈이 금융공학이라고.

모처럼 만에 일찍 들어온 금요일이었는데 이런 토론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솔직하게 얘기하는 사람들 좋다.
특히 나보다 똑똑하고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 나를 속이나 안 속이나 따지고 듣기 시작하면 듣고 나서도 힘들다.
대부분 속을 수 밖에 없으니까.

2009/04/04 22:10 2009/04/04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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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도난마 한국경제 - 장하준, 정승일 :: 2008/06/09 15:35

쾌도난마 한국경제, 장하준 정승일

 

다분히 무협소설스러운 제목의 이 책은 지난 2006년 장하준 정승일 두 교수의 대화를 대담 형식으로 엮은 책이다. 두 교수는 당시의 한국 경제 문제점을 분석하고 사회 일각에서 제기되는 여러 해법들에 대해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였다. 정치적이며 도덕적인 가치관 아래에서 자연스럽게 정답이라고 받아들여야만 했던 오답들에 대한 해설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좌파와 우파 모두에게 공격받는 경제논리가 역설적으로 더 일관적인 이유는 비정치적인, 애국적이면서 동시에 현실적인 믿음에 그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장하준 교수의 후작을 먼저 읽은 탓에 지적 충격(?)은 훨씬 덜했다. 오히려 쉬운 말로 자세하게 설명해주는 형식을 빌려온 탓에 장하준 교수의 사상을 보다 잘 이해하게 된 느낌이다.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은 과거에 대한 평가, 후반은 오답에 대한 해설이다.

 

1. 과거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 개혁

외환위기 이후 10년, 경제는 개방되었고 개혁의 물결을 따랐다. 긍정적인 면은 외환위기의 회복이 그리 길지 않았다는 것이고 부정적인 모습은 그 결과 지금의 경제상황이 바라던 모습은 아니라는 것이다. 소득구조의 양극화는 부의 불균형을 심화시켰다. 사회 갈등이 계급간 갈등에서 촉발되기도 하고 부의 인위적 분배로 해결되기도 한다. 대기업 위주의, 수출 위주의 경제정책은 산업구조를 양극화시켰으며 이는 고용 없는 성장을 현실화 하였다. 한편으로는 세계 경제에 극도로 부침하는 경제 종속화를 가져왔다.

개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IMF와 선진 경제 각료들이 바라는 시장개방과 금융화 다름 아니다. 시장개방은 신자유주의를 기본 사상으로 하며 이는 금융자본을 위한 규제 철폐 및 자본의 국가간 이동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금융자본의 이익 극대화 논리는 단기적 시각에서 시장 수익률을 초과하는 데 있다. 안정적 경기성장, 보다 정확히는 산업자본의 성장은 시장수익률 기대를 높이는 데 유의할 뿐 금융자본의 상대적 기회손실을 가져오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명분은 주주 자본주의다. 기업의 주인은 주주이며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 하는 것이 기업의 최대 목적이다. 금융자본은 산업자본을 지배를 통하여 저투자, 저성장 경제를 유도하며 시장주의 혹은 주주 자본주의의 논리는 이를 용인하는 손쉬운 수단일 뿐이다.

시장개혁의 본질은 과거에 대한 맹목적 부정에 있었다. 외환위기의 원인을 대기업의 항상적 과잉투자와 이에 기생하여 권력을 유지해온 정부의 실패로 생각했다. 이른바 외형적 성장론에 대한 비판은 요소 투입에 의한 성장보다는 요소 생산성 증가에 따른 성장을 더 좋은 것이라 말한다. 질적 성장이란 얘기이다. 이것이 오늘날 모두가 말하는 혁신의 핵심이다. 조금 덜 넣고 더 많이 만들려고 하는 요소 생산성 증가의 논리는 본질적으로 저투자를 의미한다. 종국에는 저성장 경제 체제를 만들자는 것이다. 기술의 혁신은 설비투자 혁신과 달리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체화된 지식을 생성하고 받아들이는 환경은 노동시장의 기능적 유연화에 달려있다. 혁신은 바이블이 아니다. 혁신하지 않는다 해서 죽는 것이 아니다. 노동의 수량적 유연화의 수단으로서 혁신의 칼을 휘두르는 산업은 스스로 동력을 끊어 버리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본론으로 돌아가 요약하자면, 지난 10년의 개혁은 강제적인 시장개방과 신자유주의 경제 이식일 뿐이었으며, 과거에 대한, 정치와 경제 양면에 있어서, 맹목적 부정은 이를 용인하고 감히 반론할 수 없게 만든 일종의 이념이었다.

 

- 재벌

재벌의 항상적 과잉투자가 금융위기의 원인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 첫째로 항상적 과잉투자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기업가 정신(?) 혹은 재벌식 사업확장이 시장 참가자들에겐 경제적 판단근거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지만, 기업 집단 내부의 자유로운 자본 흐름과 창업자들의 도전 정신으로 말미암아 경제 선진화의 대부분은 가능할 수 있었다. 90년대 중반 이후 금융 시장개방으로 말미암은 금융자본에 의한 과잉투자는 아시아 금융 불안을 거치며 금융기관의 부실로 이어진 것이며 오히려 대기업 재벌에 의한 경제 위기 촉발은 인과를 달리하는 것이다. 재벌개혁의 필요성은 당위적이며, 그 근거는 주주 자본주의이다. 단기적 이윤추구의 극대화는 기업가 정신의 실종상태를 가져온다. 대기업 집단의 설비투자 축소와 신규 고용감소는 주주 자본주의의 확산과 함께 진행되었다. 소액 주주 운동이니 주주 자본주의니 펀드 자본주의니 하는 것들이 국민의 고용보다 중요한 것인가. 무엇이 정말로 중요한 것인가. 재벌개혁을 경제민주화의 논리와도 맞지 않다. 경제 민주화가 무엇인가. 돈에 의해 선거권이 주어진다면 경제와 민주를 하나의 것으로 엮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오히려 경제 성장을 위한 경제 시스템이 보다 현실적인 경제 민주화의 핵심이며 따라서 대기업 집단 아래 최적화된 성장을 이루어낸 우리나라에서 재벌이 경제 민주화에 반한다는 주장은 순전히 정치적이다.

 

- 박정희식 개발독재

과거에 대한 맹목적 부정이 강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마저 부정할 필요는 없다. 세가지 논리로 박정희식 개발독재를 비난한다.

반민족적이라는 점. 그러나 개발독재는 정확히 말하면 반시장적이었으며 민족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다. 보호무역을 유지하면서 기술수입을 가속화하는 한편 인위적인 시장개입을 통해 정부의 의도를 관철시켰다. 금융시장은 개방되지 않았으며 산업집단은 정부의 힘에 의해 움직였다. 반민족이라 함은 외세적이라는 말인가. 그렇다면 개발독재는 독립적이고 능동적으로 폐쇄적이었다. 반민족이라 함이 민족의 정통성에 반한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반민족적이었다. 산업화를 추구하는 그 순간부터.

반시장적이라는 점. 맞는 말이다. 그러나 시장주의 자체에 대한 가치 수정이 필요하다. 시장은 옳은가. 그래서 반시장적이 옳지 않은가. ‘사다리 걷어차기’를 읽어보기 바란다.

반민주적이라는 점. 인정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단기적 자본 착취 후 강제적 부의 배분이 어떤 방향이었느냐 하는 것이다. 수많은 개발도상국, 특히 독재 정권아래에서 부패는 만연하고 경제는 신음하였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부의 불균형을 해소하는 장기적 관점에서 불평등한 권리배분을 추구했다. 경제성장이 누구 손에서든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비판도 여기에서 가능하다. 박정희식 경제 성장의 핵심은 저가 수출, 기술 수입의 가속화라는 철저한 시장통제와 부의 재벌 집중, 소비 지양으로 자본의 해외 이전을 막은 자본 통제에 있다. 자본주의 본질적 한계에서 제한된 최적화 박정희식 개발 경제를 인정하려는 노력이 불가능한 것은 정치적으로 보수 편에 설수 밖에 없어서인가.

 

 2. 후손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 주주 자본주의, 신자유주의의 본질

금융시장 개방과 신자유주의의 수용은 실물경제와 금융시장의 분리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강자만이 살아남는 승자독식의 경제 논리를 현실화 했다. 제한 없는 경쟁은 승자는 대기업 집단 혹은 외국계 자본가 집단이었다. 중소기업은 경쟁력 약화가 심화되면서 차입은 더욱 어려워졌다. 반면 승자집단은 내부유보자금의 증가로 차입이 필요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 부채비율의 감소는 산업의 건실화가 아니라 설비투자양극화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기업의 대출이 절실한 금융자본은 대안으로 가계대출을 확대한다. 소득 양극화를 유인한다. 결국 가계 대출 확대에 따른 구매력 감소는 내수 부진으로, 투자 축소, 고용 불안, 경기 침체의 악순환으로 흘러가고, 설비투자 양극화로 인한 대기업, 수출위주의 산업 양극화는 성장동력의 부실화와 더불어 금융기관의 가계대출 확대에 더욱 골몰하게 만드는 악순환의 시작점이 된 것이다.

 

- 노동과 자본의 역할

노동시장의 자유화를 외치는 이들이 주목해야 할 것은 수량적 유연화가 얼마나 가능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원하는 만큼 고용하고 필요한 때 감원할 수 있다는 논리는 왕정이다. 군정도 불가능한 절대 왕정의 복고이다. 신자유주의 논리는 17세기 수준일 뿐임을 명심해야 한다. 기능적 유연성이 필요하다. 고용불안은 소비불안을 낳는다. 내수 진작 없이 중소기업은 살아날 수 없고 대기업의 세계 경제 종속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중소기업 성장 없이 고용 증가는 없다. 고용의 증가 없이 지식 근로자들이 증가할 수 있을 것 같은가. 미래 성장동력은 고갈되고 있다. 노동운동은 기능적 유연화를 주장하여야 한다. 수량적 유연화를 막는 방법으로는 금융자본가들에 맞설 수 없다. 혁신하자고 하는 기업에, 왜 혁신하여야 하냐고 질문을 던지고, 장기적 성장이라는 답에서, 비정규직이라는 신분이 당신들의 미래와 조우할 확률이 얼마나 되냐고 투쟁하라.

중국의 성장이 산업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원인인가. 국제 경쟁에서 도태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가격 경쟁에서 밀리기 때문이다. 정답은 기술 경쟁과 경영능력에 의한 차별적 우위를 가져가야 함이다. 그럼에도 중국의 저가 경쟁에 대비해 임금을 높일 수 없다는 주장은 동일한 방식으로 가격 경쟁을 유지하겠다는 어처구니 없는 주장이다. 그러면서 성장을 운운하는 것은 과연 누구의 성장이란 말인가. 근로자의 임금은 중국 수준으로 맞추면서 국가 경제의 성장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면 자본가들의 이익은 지금보다 얼마나 더 늘어나야 하는가. 양극화를 심화시키겠다는 주장이다. 임금 동결을 얘기하기 전에 금융자본이 요구하는 수익률을 낮추어라. 장기적 고용안정을 통한 기술의 축적, 기술경쟁력을 높일 수 있도록, 기업의 혁신이 개인에 미래와 인생과 길을 같이 하도록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여야 한다.

 

- 관치 경제, 국가주의가 나쁜 것인가

시장은 얼마나 합리적인가. 합리성이란 무엇인가. 시장의 비대칭성, 정보의 불완전성을 최소화 하는 것이 오히려 시장지향적이며 그것은 정부의 개입으로 가능하다. 불완전하거나 실패인 상태로 그대로 두는 것은 반시장적이다.

 

스웨덴식 사회적 대타협은 가능한가. 그것이 정답이라면 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간단하지 않은 것은 정치 세력화 하는 경제 무능집단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대안 없는 반미나 시장에 미친 우파도 문제지만 이슈에 대해 정치화하여 학생들이 나서 나라의 경제를 운운하는 것은 정의를 부르짖는 것 보다 비현실적이며 허무맹랑한 것이다.

계급의 문제다. 소득의 양극화는 계급 상승의 불가능성을 인식시키기 전에 그것이 비현실적인 것이었음을 고백했어야 한다. 지금 가난한 자는 절대 부자가 될 수 없다. 일류 사회에 사는 이들은 실패할 가능성이 없다. 세대간 단절을 지적했던 우석균 교수의 지적은 단편적이다. 그것은 계급이다. 부에 의한 계급간 단절은 정치적,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는 허망한 기대를, 경제적 이슈에 대해서는 잔인한 현실을 가져다 줄 뿐이다. 쇠고기가 아니라 FTA에 분노하라. 고소영이나, 강부자가 아니라 세계 금융자본을 비난하라. 주주 자본주의나 시장경제, 신자유주의, 성장과 혁신의 바이블이 계속되는 한 계급은 심화될 뿐이다. 사소한 정치적 이슈에도 분노하는 대중이 늘어나는 이유는, 대중도 대중을 바라보는 엘리트 지식인도 정작 문제의 원인이 계급간 단절과 단절을 인정하지 않는 허망한 기대가 존재함이란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탓이다.

 


. 흥미로운 책이었다. 정리도 쉬웠고, 사다리 걷어차기나 나쁜 사마리아인 읽기에도 편했다. 88만원 세대나 샌드위치 위기론처럼 다소나마 논리적 비약이 있을지 모른다. 현실 인식에 대한 공감이 논리적 이해보다 먼저 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억울한 마음은 이런 책을 읽으면서 더 커진다. 사소한 문제에 미치도록 분노하는 것은 단절과 단절을 인정하지 않는 허망한 기대 때문임을 다시 한번 말하고 싶었다.


2008/06/09 15:35 2008/06/09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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