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Good&Bye :: 2009/06/13 22:27

굿'바이(Good & Bye おくりびと)
'돌 편지. 옛날엔 말야. 문자가 없었을 때는 사람이 자기 마음을 닮은 돌을 주워서 상대방에게 전해줬대. 받은 사람은 그 돌의 감촉이나 무게를 가지고 준 사람의 마음을 헤아렸고. 예를 들어 화가 났을 때는 마음의 평화를 바라고 힘들 때는 상대방을 걱정한다던가 말야.'
예전 김훈 선생님의 글에서 죽음의 일상성에 관하여 읽은 기억이 있다. 살아가는 일에서 죽음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태어나는 것과 같은 비율로 우리의 일상에 함께 있으며, 기존의 생명이 죽어없어지지 않는다면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고 자랄 수 없는 것이기에 죽음이야말로 신이 우리에게 준 가장 큰 은혜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일상의 죽음을 일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죽음의 보편성이 개별성을 설명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태어나고 살아가고 죽어가는 보편적 인류의 삶이 일상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각각의 생명이 개별성을 가져 우리 모두로 하여금 살아가는 일상을 뛰어넘는 기쁨과 경이를 느끼게 해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편적 죽음이 개별적 슬픔을 어찌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다행히도 그 개별적 슬픔을 느낄 만큼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 본 적은 없다. 감히 짐작해 보건데 슬픔의 근원은 어찌할 수 없는 단절에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더이상 새로운 기억을 만들 수 없다는 영원한 단절, 관계의 불가능성이다. 세월이 흐르듯 슬픔도 흘러 먹먹한 그리움으로 남는 경우도 보았으나 그때에도 역시 어찌할 수 없는 안타까움은 남아 세월보다 더디게 흐르는 까닭이 된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소통할 수 없다는 일은 죽음만큼이나 슬픈 일이다. 뜻을 전할 수 없고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사실이 곧 죽음과도 같은 절망감을 느끼게 한다.
죽음의 일상성과 개별성에 관한 영화다. 그리고 슬픔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살면서 단절되었던 소통의 회복을 제시한다. 직업으로서 죽음을 맞이하는 일과 아버지의 죽음을 대하는 일은 슬픔의 색깔이 다르다.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의미에서 그 죽음은 새로운 생명과 대체되는 것이지만, 개인적으로 슬픔을 극복하는 힘은 그가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었던 소통에 있다. 영원한 단절이 아니라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애틋한 감정, 삶의 의지 같은 것. 그렇기에 아버지의 죽음은 아들에게 영원한 단절 그 슬픔을 넘는 의미로 다가온다.
덧. 원제는 '보내는 이'라는 뜻의 일어이고, 아케데미 수상은 Good and bye 로 되었는데 한국 개봉은 굿'바이다. '굿바이'라는 말이 사실은 가장 역설적이고 정치적인 말인 것 같은데, 진정한 의미에서 '바이'가 되려면 원수가 아닌 한 '굿'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내가 한 말은 아니고 어느 팝 가사의 내용이다.
잔잔한 느낌으로 오후에 본다. 슬픔이 이렇듯 잔잔한 일이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