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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우시절 :: 2009/10/11 16:04

우리는 어떤 기억으로 잊혀지고 있을까. 好雨時節, 2009
안다. 결국 모든 것은 시간의 문제이고, 기억은 늘 단편적이다.
얘기하지 않아도 좋을 무거운 이야기 하나쯤이야 누구나 가슴 속에 있기 마련이지만,
말하지 않았어도 마음 가는대로 되고 마는 것이 사랑이다.
시간이 내 편이라면. 내 편이었더라면.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걸까, 꽃이 펴서 봄이 오는 걸까.'
좋은 비는 내릴 때를 안다. 마찬가지로 내릴 때를 아는 비가 좋은 비다.
맞아도 좋을 가슴 시원한 봄비와도 같이 사랑한다 말할 때를 아는 것이 진정으로 좋은 사랑이 아닌가 한다.
흘러 넘치지 않으면서도 바르게 자란 서른 즈음의 순수한 감정들을 잘 보여주는 영화인 것 같다.
곁가지로 듣고 싶은 얘기가 많아서 아쉬웠지만
우연이라도 다시 만나 사랑할 수 있다는 그 순수한 판타지만으로도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근데, 솔직히 팀장 정우성이라면 없는 기억을 만들어내서라도 사랑에 빠질 듯.
'눈치 있는 사람' 역할을 제대로 해준 김상호 아저씨 연기가 참 좋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일등 연기는 '도무지 태어나서 하는 일이라곤 먹고 뒹굴고 누워있는 것 밖에 없음'이라는 연기를 해준 팬더. 쿵푸 팬더 캐릭터가 거짓이 아니었다.

Up, 2009 :: 2009/08/08 23:40

삶이라는 여행, 여행이라는 꿈, 꿈이라는 약속, 약속이라는 삶. - '이동진의 영화풍경' 업 Review 가운데
동화같은 집에 예쁜 풍선을 수없이 매달아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꿈을 꾸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영화다.
인생의 약속을 같이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
이루지 못하는 꿈이었다 해도 기억으로 남아 응원해주고 있음이 힘이 된다.
누군가는 날아가는 꿈을 꾸고, 또 어떤 이는 그보다 더 멋진 여행을 꿈꾸는 것이 우리 삶이다.
영화는 잠시 잊고 있던 꿈처럼 행복한 인생을, 다시 누군가와 약속하고 싶은 기분 좋은 마음을 가득채워주었다.
이렇게 밝고 즐거운 영화를 본 게 참 오랜만인것 같다.
애니메이션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동화적인 감성이 이토록 아름다운 것인지 몰랐다.
시작 장면에서의 주인공 할아버지의 인생이야기는 그 어떤 영상보다 아름다운 장면으로 기억될 것 같다.
아름다운 이야기를 쓰고, 재미있는 그림을 그리고, 나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일,
영화관을 나오면서는 이런 재미난 일을 하고 사는 그들이 부럽기도 했다.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 나라도 한번 그려볼 수 있을까 하는 욕심이 생긴다.
마더 :: 2009/06/28 18:09

마더는 독무獨舞로 시작해서 군무群舞로 끝이 난다.
춤은 괴로움을 잊으려는 속된 몸짓이다. 모성이 부리는 가장 속된 몸짓이다.
처음에는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노력하다 끝내는 기억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괴로움을 잊기 위한 유일한 수단은 망각 이었다.
지독한 딜레마를 보여주는 영화다.
결론이나 설정에 관해 달리하는 얘기들이 있지만, 표면적인 것이 전부라고 믿고 싶다.
맹목적인 모성애 앞에서 죄의식도 없고 정의도 없다. 그 모성애로 인하여 마주하는 절망적인 삶에 관한 영화다.
모성애는 본질적으로 맹목적이다.
아들을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죽이기도 하고
반대로 아들을 살리기 위해 선악의 기준 따위 무시해버리기도 한다.
아들이 죄를 저지르지 않았을거라는 확고한 믿음에서 출발하였으나 아들이 저지른 죄를 대면하는 순간,
감정의 통제 아래 놓인 모성은 또다른 살인을 저지르고 만다.
선악의 구분조차 가늠되지 않는 미숙한 이성이 죄를 짓고, 그보다 더 미숙한 감성이 죄 없이 벌을 받는다.
죄를 짓는다는 것은 순수한 인간으로서의 죄의식과 정의관에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그것은 모성애에 의해 속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엄마로서 가지는 자식을 위한 맹목적인 사랑이 자연인 나로서의 삶을 절망속으로 내던지는 딜레마를 경험한다.
아무런 죄 없이 죄인인 아들을 대신하여 벌을 받는 아이는 그를 구해줄 엄마가 없다.
사회적, 보편적 의미에서의 선악이 결국 모성애라는 지극히 주관적인 감정에 의해 결정되는 꼴이다.
얼마나 잔인한가.
무조건적으로 찬양되고 미화되고 이상화되어야 하는 집단적인 가치가 과연 존재할까.
엄마와 아들이라는 관계 역시 일종의 집단이고 그 속에서 기대되고 지켜야 할 역할과 가치가 존재한다.
가족이라는 것도 학교나 회사나 지역 집단, 국가와 마찬가지로 관계에 의해 생겨난 집단 조직일 뿐이다.
따지고 보면 개인 대 개인의 보편적 사회 관계 외에 다른 형태의 집단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특별한 감성적 집단 성향을 가질 수는 있다.
집단적 가치들이 개인에게 맹목적으로 강요될 때 개인의 삶은 가장 절망적이고 잔인하게 희생되어야 한다.
엄마와 아들의 관계에서도 서로가 서로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맹목적인 모성애 밖에 남지 않아 그 간극을 메우고 있다면, 누구에게나 이와 같은 비극은 충분히 생겨날 수 있다.
엄마와 아들이 하나이고 다르지 않다는 인식은 서로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고 있음을 전제로 해야 한다.
맹목적인 모성애 만큼이나 영화가 보여주는 절망의 깊이가 깊다.
충분히 이해할 수 없을만큼 압도적인 영화 인듯하다.
굿'바이, Good&Bye :: 2009/06/13 22:27

굿'바이(Good & Bye おくりびと)
'돌 편지. 옛날엔 말야. 문자가 없었을 때는 사람이 자기 마음을 닮은 돌을 주워서 상대방에게 전해줬대. 받은 사람은 그 돌의 감촉이나 무게를 가지고 준 사람의 마음을 헤아렸고. 예를 들어 화가 났을 때는 마음의 평화를 바라고 힘들 때는 상대방을 걱정한다던가 말야.'
예전 김훈 선생님의 글에서 죽음의 일상성에 관하여 읽은 기억이 있다. 살아가는 일에서 죽음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태어나는 것과 같은 비율로 우리의 일상에 함께 있으며, 기존의 생명이 죽어없어지지 않는다면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고 자랄 수 없는 것이기에 죽음이야말로 신이 우리에게 준 가장 큰 은혜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일상의 죽음을 일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죽음의 보편성이 개별성을 설명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태어나고 살아가고 죽어가는 보편적 인류의 삶이 일상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각각의 생명이 개별성을 가져 우리 모두로 하여금 살아가는 일상을 뛰어넘는 기쁨과 경이를 느끼게 해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편적 죽음이 개별적 슬픔을 어찌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다행히도 그 개별적 슬픔을 느낄 만큼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 본 적은 없다. 감히 짐작해 보건데 슬픔의 근원은 어찌할 수 없는 단절에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더이상 새로운 기억을 만들 수 없다는 영원한 단절, 관계의 불가능성이다. 세월이 흐르듯 슬픔도 흘러 먹먹한 그리움으로 남는 경우도 보았으나 그때에도 역시 어찌할 수 없는 안타까움은 남아 세월보다 더디게 흐르는 까닭이 된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소통할 수 없다는 일은 죽음만큼이나 슬픈 일이다. 뜻을 전할 수 없고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사실이 곧 죽음과도 같은 절망감을 느끼게 한다.
죽음의 일상성과 개별성에 관한 영화다. 그리고 슬픔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살면서 단절되었던 소통의 회복을 제시한다. 직업으로서 죽음을 맞이하는 일과 아버지의 죽음을 대하는 일은 슬픔의 색깔이 다르다.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의미에서 그 죽음은 새로운 생명과 대체되는 것이지만, 개인적으로 슬픔을 극복하는 힘은 그가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었던 소통에 있다. 영원한 단절이 아니라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애틋한 감정, 삶의 의지 같은 것. 그렇기에 아버지의 죽음은 아들에게 영원한 단절 그 슬픔을 넘는 의미로 다가온다.
덧. 원제는 '보내는 이'라는 뜻의 일어이고, 아케데미 수상은 Good and bye 로 되었는데 한국 개봉은 굿'바이다. '굿바이'라는 말이 사실은 가장 역설적이고 정치적인 말인 것 같은데, 진정한 의미에서 '바이'가 되려면 원수가 아닌 한 '굿'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내가 한 말은 아니고 어느 팝 가사의 내용이다.
잔잔한 느낌으로 오후에 본다. 슬픔이 이렇듯 잔잔한 일이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Seven Pounds :: 2009/02/13 22:20

In seven days, God created the world. And in seven seconds, I shattered mine.
그 죄책감의 일그램이라도 느껴볼 수 있다면 그의 결정을 이해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선량한 희생으로 기억될 그의 죽음이 실은 지독한 자기 위안이었단걸 그 누가 알 수 있을까.
더욱이 그를 사랑했던 이들에겐, 죽음으로써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어버리고 싶은 그를 받아들일 수 없을테니.
죄책감의 무게 앞에서 먼저 죽기를 결심하고, 그리고 죽음 뒤에 남겨야 할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먹먹한 여운은 누구에게도 이해되지 않을 그 결심과 죽어서도 가벼워지지 않았을 것 같은 죄책감 때문이다.
단 1 파운드의 살점이 곧 생명을 의미하듯, 때로 하나의 작은 죄책감이 삶을 지탱할 수 없게 만든다.
그것으로 죽기를 작정해 본 적 있는가.
죄책감의 무게는 희생으로 덜어내지지 않는다.
이해되지 못할 결심이라해도, 혹은 의미없을 희생으로 기억될 뿐이라 해도,
어느 한 순간의 실수와 그로 인한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앞에 놓고,
마음의 위안보다는 차라리 처음부터 내가 존재치 않았기를 바람이 죄책감이 이끄는 가장 무서운 결말이다.
나약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다만 그 나약함으로 인한 잔인한 선택에 눈물 흘려도 된다.
구구, 이누도 잇신 :: 2008/10/25 22:42
영화를 선택한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단지 영화에만 집중해서 얘기한다면 이누도 잇신 때문이었다. 물론 노다메가 아닌 우에노 쥬리를 보는 궁금함도 있었지만. '조제...' 는 매니아들이 많은 영화고 마찬가지로 내게도 특별한 기억이 되는 영화이다. 만남과 헤어짐에 관한 얘기는 모두에게서 들을 수 있는 것이에 굳이 내 얘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조제가 갖는 특별함은 '메종 드 히미코' 도 마찬가지였고, '구구...' 에서도 역시 그랬다. 특별하고 약한 '존재'에 대한 집중이다.
사십이 넘은 싱글 여성 만화가라서가 아니다.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만화를 그리고 있었지만 정작 나 자신은 도움 받지 못한다는 허무와, 암을 이겨내고 살아남기 위해서 겪어야만 하는 상실감으로 나는 특별하고 약한 존재가 된다.
주인공의 환상은 초라한 과거에서 '즐거웠다는' 위안을 찾고, 결국 죽은 고양이가 산 사람을 살리는 '낭만'에 의지하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영화의 결론보다도, 사실 내게 고양이 같은 친구는 없으니까, 주인공이 느꼈던 우울에 깊이 공감했다. 더러는 긍정적인 삶으로의 희망을 찾기 위해 이 영화를 본다고 말할지도 모를 일이나, 나는 적어도 영화적 낭만이 현실에도 일어나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결국 현실에서 주인공은 어떻게 다시 일어나는가 생각해보게 된다.
의도치 않게 이런 비슷한 얘기를 나누고, 그 덕분에 집에 오는 내내 과거와 삶의 목표 같은 것들 생각해보았다. 내 지난 삶이 아름다운 것이었노라 타인에게서 칭찬받을 자신도 없고, 그렇다고 남에게만 도움되는 삶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무력감이 진하게 느껴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삶에서 무언가를 포기해야 할 때, 그 대가가 내가 원하는 것인가, 원하던 것이었던가, 그리고 그 끝이 어떤 결과를 맺을지를 생각해보는 것은 영화나 현실에서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조제..' 나 '메종 드 히미코' 에서 어렴풋이 내 사랑이나 추억들에서도 비슷한 모습이 그려지는 것 같아 먹먹한 기분이었다. '구구..'는 고양이 때문인지 같이 보는 사람때문인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히 다가오진 않았지만, 전작들과는 달리 그 그림자가 추억이나 타인이 아닌 지금의 나를 직접 그리는 것 같아 작지만은 않은 공감이 있다.
덧) 극중에서 고양이가 참 귀엽게 나오는데, 이래서 고양이 영화로 대부분에게는 기억될지도 모르겠다. 감독으로서는 안타까울 것도 같은데, 생각없이 보기에는 그 편이 더 나은건지도. 홈페이지에서 찾은 '구구' 사진. 참고로 위 아래는 동일 고양이 입니다. ㅎㅎ

구구. 어릴때.

영화 종반. 진짜 빨리 자라네;;
영화는 영화다 :: 2008/09/14 22:58
* 영화는 영화다 OST 中 28. End credit

영화는 영화다, 소지섭, 강지환, 장훈 감독, 김기덕필름 제작
데쟈뷰. 어디선가 느껴보았던 것 같은 기시감. 분명 처음 보는 영화인데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언젠가 경험한 불편함이 느껴졌다. 그것은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하지 않음이었다.
각본을 맡았다고 한다. 세련된 영상과 자주 있는 유머, 쉽고 흡입력 있는 이야기 구조는 김기덕 감독의 작품과는 분명히 다르다. 하지만 그 느낌과 주제는 닮아있다. 정확히는 보기에 좋도록 잘 자라난 느낌이다. 나쁜 남자의 조재현이나 해안선의 장동건이 느껴진다. 기대를 깨버리는 평범하지 않음과 안타까움, 그리고 편치 않음 때문이다.
무간도를 예상했던 것은 비슷했다. 배우와 깡패, 스타와 건달, 주인공과 악역이라는 둘 사이의 대립은 무간도에서보다 표면적이고 그래서 더욱 직접적으로 둘 사이의 전쟁은 이해되고 각자의 존재와 고민이 동일시 되기도 한다. 그러나 더 이상 비교할 수 없는 것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선악의 구도이다. 무간도가 확연하게 나누어진 양 편을 사이에 두고 어느 쪽에도 속할 수 없는, 보다 정확히는 어느 쪽에서도 이해되지 않는 혼란을 얘기하고 있다면 강패와 수타는 서로를 서로에게 그려보는 혼동을 얘기하고 있다. 한편으로 진영인과 유건명은 양자택일을 강요받지만 수타와 강패는 독립적이며 수타가 강패에게 느끼는 건 일종의 열등감일 뿐 혼동은 강패의 몫이기에 중심이 기울어진 느낌이다. 물론 두 영화를 비교하는 것 역시 전적으로 내 눈높이에서뿐 일 것이다.

어두운 현실 위의 싸움에서는 선과 악이 구분되지 않는다.
본류를 벗어나 각자가 처하는 시련은 믿음과 배신이라는 세상에 대한 냉소를 보여준다. 다만 수타가 헤어지는 연인을 다시 만나는 과정은 배신을 벗어나 또다시 믿음과 새로운 희망을 가지는 선의 진도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다고 느끼는 강패는 영화적 환상에서 벗어나 냉소 가득한 현실을 직시해야 함을 얘기하고 있다.
영화는 영화다. 기대한 결말을 마주하지 못한 관객에게 이것은 김기덕 영화일 뿐 다른 누구의 영화일 거라 기대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현실로 돌아간 마지막 강패의 눈빛이 연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랑하는 이를 사랑하는 방법과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는 방법이 보통의 눈으로 이해되지 않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현실이기에 이해되는 방법으로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바이지만, 불만과 불안, 열등감과 자격지심은 불안하게도 조금씩 김기덕 감독의 작품을 이해하게 만든다. 타인에게 불편해지는 만큼 나는 그 불편함에 익숙해진다.
무간도 :: 2008/09/13 00:52

올핸 작년에 비해서 많은 영화를 본 것 같다. 혼자 보는 습관에 익숙해진 탓도 있겠지만 개봉작들을 다른 사람들하고 같이 가서 보는 일들이 종종 있어서 예전하고는 달리 일단 보고 나서 다시 한번 더 보고 싶은 영화를 찾는 것이 하나씩 기다렸다 실망하는 일보단 낫다고 경험한 때문이었다.
우울한 영화들은 그 나름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 중에서 내가 좋아할 만한 우울함이라고 한다면 일종의 정체성의 혼란이나 현실과의 불화 같은 것들인데, 그런 면에서 다크나이트가 괜찮았고 자연스레 무간도가 생각났다.
내일도 한 편 보러 갈 생각으로 뭐가 있나 찾아보다 문득 저 장면, 무간도에서 진영인과 유건명이 처음 만났던 장면이 생각났다. 아마 저 장면은 3편인 것 같은데, 영화는 영화다 라는 영화; 를 찾아보다 남자 둘의 대칭 구도라면 다크 나이트 보단 무간도 느낌이 더 가까운 것 같아서.
* 채금 - 잊혀진 시절
음악은 찾아보니 한국에선 발매되지 않은 음반이라하고, 설령 발매되었다 하더라도 중국 음악은 장국영 장학우 유덕화 말고는 아는게 없어서 들어볼 기회는 없었을 것 같다. 그 장면의 느낌을 실제 가사와 비교해보니 비슷한 것 같다가도 끝에 가서는 다른 느낌이어서 조금 낯설다. 하지만 조용한 방에 볼륨을 크게 해서 첫부분을 들으면 확실히 그 첫 만남이 떠오른다.
영화의 모든 것이 다 좋았지만 이 음악 덕분으로 그리고 3편의 마지막 장면이 1편의 시작으로 돌아가는 것이어서 둘의 만남이 더 기억에 남는다. 음악 하나로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둘 사이가 선악으로 구분되지 않는 상태에 놓여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장면인 것 같다.
핸콕 :: 2008/07/05 22:48

기분 전환 하려고 보러 갔건만 뭔가 좀 낚인 기분. 아이언맨을 기대했는데 프랑켄슈타인이자나!
영웅 이야기 쪼금 하다가,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는 only one of my kind 나오다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사랑이야기로 마무리.
이거 뭐 욕 때문이 아니라 이해가 안되서 19금 받야아 될 듯.
암튼 어제부터 계속 상처받는 주인공들 등장인데,
무슨 일을 하든 꼭 좋은 사람이 될 필요는 없는 거잖아.
좀 무관심하고 약간은 이기적이면서 조용하거나 재미없거나 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게 사실이고.
어째서 본인들은 그렇지 못하면서 남에게는 바라는 입장이 되어버리는 걸까.
타인의 기대대로 살아가다 보면은 혼자서 느끼는 외로움은 더 커진다.
피곤한 친구 앞에 두고 이른 시간에 맥주 한 잔 마시면서 주제가 뭘까 궁시렁거리고 있는데 친구 하는 말.
"넌 의미를 부여하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다니깐."
그냥 코미디 영화라.. 는 건가.
응. 심각해지지 말자.
그래도 귀에 남는 대사가 있었다.
기자회견 하는 장면에서.

더 좋은 사람이 되겠습니다.
언젠가 나도 그렇게 얘기하고 싶다.
I want you to see the best of me.
긴 기다림이 끝나면.


